나는 어디에 있는가?
존재와 공간이 맺는 관계를 생각해본다. 존재란 무엇인가? 소중한 나의 친구는 존재란 어떤 것의 모든 것이라고 정의내린다. 가장 재미난 정의 중 하나였다. 어떤 것의 모든 것. 1은 때로 전체가 된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충만한 전체와 전체의 관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은 모든 가능성을 품는다. 보이기도, 들리기도, 느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그런 수많은 존재들.
'나'는 마찬가지로 보이기도, 보이지 않기도, 들리기도, 들리지 않기도, 느껴지기도, 느껴지지 않기도 하는 존재 중 하나이다. 나는 어떤 것이자 모든 것이다. 나로 존재한다는 것은 나로 감각되거나 감각되지 않는 무언가를 포괄한다. 감각된다는 것은 현실에서 내가 나를 인지하는 것이다. 나는 나를 느낀다. 거울을 보며 나를 본다. 이 글을 쓰며 타자기 위에서 움직이는 나의 손가락을 본다. 말을 하는 나의 목소리를 내 귀로 듣는다. 이 방의 온도와 습도를 피부로 느낀다. 나의 혀는 물의 차가움을 안다. 나는 나를 인지하고 감각한다.
그런데 나는 한편으로 감각되지 않는다. 새로운 가능성을 품은 나. 내가 바라는 모습을 가진 저 먼 미래의 나. 내가 상상하는 나는 감각되지 않는다. 나는 어떤 나를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다. 어떤 나는 어렴풋한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지금 내가 단순히 인지할 수 없기에 (모든 나) - (지금 여기서 내가 감각하는 나) 로 존재한다. 하나의 새싹이 자신이 피워낼 꽃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고, 아직 변태를 겪지 않은 애벌레가 자신이 머지 않아 활짝 펼칠 날개의 감촉을 느낄 수 없듯이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닌 나를 알 수 없다.
미지수로 남은 나를 알기 위해 우리는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쓴다. 고통받기도 하고 좌절하고 때로 나에게 실망하고 자책한다. 때로 웃어 넘기며 나를 더욱 잘 이해한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넘어 '나는 앞으로 어디에 있을 것인가'를 담보한다. 그래서 어렵다. 미지의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프란츠 카프카는 그레고르 잠자를 통해 인간이 팔다리를 휘젓고 다니던 3차원의 방이 아닌, 벌레가 되어 납작한 2차원의 바닥에 달라붙은 그 감각을 상상하도록 했다. 그렇다면 그레고르 잠자는 바뀌었는가? 존재는 바뀌기도, 바뀌지 않기도 했다. 사람은 벌레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레고르 잠자이다. 벌레가 되기 전 그레고르 잠자는 단잠을 꾸는 동안 들판을 뛰어다니는 상상을 했다. 벌레로 변한 그는 아마 꿈을 꾸며 하늘을 향해 높게 솟아 있는 풀 한 포기의 매끈한 감촉을 상상할 것이다.
'새로운' 존재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처럼 공간도 변화한다. 1) 존재에 의해 공간은 바뀌기도 하고 2) 공간도 그 자체로 변화한다. 설령 우리가 같은 땅 위에 서있을지라도 나라는 존재와 또 다른 존재가 감각하는 공간은 너무나 다르다. 또, 한 존재가 경험하는 공간은 달라진다. 존재가 공간을 떠나기도 하고, 때로 세계가 존재를 가차없이 몰아내고, 밀어낸다. 납작하게 짓눌리거나(잠자의 비극적 운명은 결국 그가 벌레로 변한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그의 가족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끝난다), 땅을 빼앗기기도 하고, 언 땅이 녹아내리기도 하고, 사막의 모래가 더욱 뜨겁게 달궈지기도 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땅은 있는가? 존재가 서있을 그 땅은 여전히 있는가? 앞으로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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